하와이 원주민 역사: 카메하메하 왕조와 이올라니 궁전의 슬픔
우리가 '하와이'를 떠올릴 때 연상되는 이미지는 대부분 에메랄드빛 바다, 눈부신 백사장, 그리고 여유로운 알로하 정신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낙원의 풍경 뒤에는 태평양 한가운데서 독자적인 문명과 왕국을 건설했던 한 민족의 장엄하고도 슬픈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와이 원주민의 역사는 단순한 휴양지의 과거를 넘어, 외부 세력의 거센 파도에 맞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주권을 지키고자 했던 치열한 투쟁의 기록입니다. 특히 하와이 제도를 하나의 강력한 왕국으로 통일한 카메하메하 왕조의 흥망성쇠와 그 마지막 숨결이 깃든 이올라니 궁전의 이야기는 오늘날 하와이의 정신적 근간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본 글은 화려한 관광지의 이면에 가려진 하와이의 진정한 심장, 즉 카메하메하 대왕의 통일 위업부터 마지막 군주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의 비극적인 퇴위까지, 하와이 왕국의 영광과 좌절의 서사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자 합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나열을 넘어, 한 독립 국가가 어떻게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갔는지, 그리고 그들의 문화와 정신이 오늘날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올라니 궁전의 텅 빈 옥좌에 담긴 침묵의 외침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와이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태평양의 나폴레옹, 카메하메하 1세와 통일 왕국의 서막
18세기 후반, 하와이 제도는 통일된 국가가 아닌, 각 섬을 지배하는 추장(Aliʻi)들이 끊임없이 반목하고 전쟁을 벌이는 분열의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하와이 섬(빅 아일랜드)의 코할라 지역에서 태어난 한 인물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니, 그의 이름은 바로 칼라니누이아마마오 이 카이아말라마누 이 아쿠아 케쿠히아우라 이 케카이아울리 카우 이 카히 아파파 오 코나 이 카우아 아우미히 아우미히 카메하메하, 통칭 카메하메하 1세였습니다. 그의 탄생을 전후하여 핼리 혜성이 나타났다는 전설은, 그가 장차 하와이 제도를 통일할 위대한 군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뒷받침하며 그의 신성성을 부각시켰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전사로서 명성을 떨친 카메하메하는 단순히 용맹하기만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외교가였습니다. 1778년 제임스 쿡 선장이 하와이에 당도한 이래로 서구 세력과의 접촉이 빈번해지자, 카메하메하는 그들의 강력한 무기, 즉 총과 대포의 위력을 누구보다 빨리 간파했습니다. 그는 서구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적극적으로 신식 무기를 확보하고, 이를 다룰 수 있도록 존 영(John Young)과 아이작 데이비스(Isaac Davis) 같은 외국인 고문을 등용하여 자신의 군대를 근대화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창과 돌팔매에 의존하던 다른 추장들과의 군사적 격차를 압도적으로 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795년, 카메하메하는 그의 통일 전쟁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로 기록된 '누우아누 전투(Battle of Nuʻuanu)'를 감행합니다. 오아후 섬을 침공한 그는 압도적인 화력과 치밀한 전략으로 상대 군대를 누우아누 팔리 절벽으로 몰아넣었고, 수백 명의 전사들이 벼랑 아래로 떨어져 장렬히 전사하며 전투는 카메하메하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이 승리로 오아후 섬까지 장악한 그는 사실상 하와이 제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마침내 1810년, 유일하게 저항하던 카우아이 섬의 추장 카우무알리이가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항복하면서, 하와이 제도는 역사상 최초로 단일한 주권 아래 통일된 '하와이 왕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카메하메하 대왕은 단순히 영토만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마말라호에 카나바이(Māmalahoe Kānāwai)', 즉 '부서진 노의 법'을 제정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등 내치에도 힘썼습니다. 이 법은 길가에 누워 자는 노인이나 아이조차도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는 인도주의적 법령으로, 그의 애민 정신을 상징하는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됩니다. 이처럼 카메하메하 1세는 분열과 혼란의 시대를 종식시키고,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태평양을 휩쓸던 격동기에 하와이 민족의 독립과 주권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마련한 위대한 국부(國父)였습니다.
서구 문물의 파도 속에서, 이올라니 궁전의 영광과 비극
카메하메하 대왕이 세운 왕국은 그의 후계자들을 거치며 서구 문물과의 충돌과 융합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해야 했습니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급격히 팽창하며 왕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하와이 왕국의 자주성과 근대성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던 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제7대 국왕 데이비드 칼라카우아였습니다. 그는 하와이가 결코 서구 열강에 뒤지지 않는 문명국가임을 입증하기 위한 상징적 건축물로, 미국 땅에 세워진 유일한 공식 왕궁인 '이올라니 궁전'의 건설을 명했습니다. 1882년 완공된 이올라니 궁전은 당대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였습니다. 미국 백악관보다도 먼저 전등을 설치했으며, 수세식 화장실과 실내 전화까지 갖춘 이 궁전은 하와이 왕국의 국력과 위엄을 대내외에 알리는 자부심의 표상이었습니다. 칼라카우아 국왕은 이 궁전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하고 외국의 사절들을 맞이하며, 하와이를 주권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또한 서구 문화의 영향력 속에서 점차 잊혀가던 하와이 고유의 전통문화를 부흥시키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선교사들에 의해 금지되었던 훌라춤을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고대 서사시와 신화를 집대성하는 등 '호울루 라후이(Hoʻoulu Lāhui)', 즉 '민족의 증진'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국을 향한 외부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미국계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하와이의 미국 합병을 꾀하며 왕권을 무력화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결국 1887년, 이들은 무력을 앞세워 칼라카우아 국왕에게 강압적으로 새로운 헌법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총검 헌법(Bayonet Constitution)'이라 불리는 이 헌법은 국왕의 행정 권한을 대부분 박탈하고, 재산 소유를 기준으로 투표권을 제한함으로써 하와이 원주민 대다수의 참정권을 빼앗고 부유한 백인 농장주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한때 하와이의 영광과 자주를 상징했던 이올라니 궁전은 이제 힘을 잃은 군주가 정치적 허수아비로 전락한 채 머물러야 하는 굴욕의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칼라카우아 국왕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 189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병으로 서거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서거 이후 왕위는 그의 동생인 릴리우오칼라니에게 계승되었고, 이올라니 궁전은 곧 하와이 왕국 최후의 운명과 맞닥뜨릴 비극의 무대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국의 마지막 숨결, 릴리우오칼라니 여왕과 몰락의 서사
오빠인 칼라카우아 국왕의 뒤를 이어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군주로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총명하고 강인한 의지를 지닌 지도자였습니다. 그녀는 '총검 헌법'으로 인해 훼손된 왕국의 주권과 하와이 원주민들의 권리를 되찾는 것을 자신의 최우선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여왕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국왕의 권한을 회복하고 원주민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주권 회복 노력은 기득권을 침해당할 것을 우려한 미국계 이주민들과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샌퍼드 돌(Sanford B. Dole)을 중심으로 한 이들 세력은 '안전 위원회(Committee of Safety)'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공공연히 왕정 폐지를 외치며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893년 1월 17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안전 위원회는 미 해군 함정 USS 보스턴호의 해병대를 호놀룰루 항에 상륙시켜 이올라니 궁전을 포위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내정간섭이자 무력 시위였으나, 이들은 '미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서 여왕의 군대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혈 충돌이 발생할 경우 수많은 하와이 백성들이 희생될 것을 우려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고뇌 끝에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그녀는 쿠데타 세력인 임시정부가 아닌, 공정한 조사를 통해 자신의 주권을 회복시켜 줄 것이라 믿었던 미국 정부를 향해 주권을 '일시적으로' 이양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불의에 대한 항복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왕국의 정통성을 지키려 했던 주권자로서의 마지막 저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 정부는 결국 합병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고 하와이 왕국은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후 여왕은 왕정 복고를 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다스리던 왕국의 상징이었던 이올라니 궁전 2층의 작은 방에 8개월 동안 유폐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 채 고독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퀼트에 하와이 왕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문양들을 수놓으며 민족의 정기를 되새겼고, 조국과 백성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담아 불후의 명곡 '알로하 오에(Aloha ʻOe)'를 비롯한 수많은 노래를 작곡했습니다. 이올라니 궁전은 한때 하와이의 주권과 영광을 상징하는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나라를 잃은 마지막 군주의 슬픔과 고뇌가 서린 감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1898년 하와이는 결국 미국의 영토로 공식 합병되었고,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군주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남은 생을 하와이 민족의 권익과 문화 보존을 위해 헌신하다 1917년 서거했습니다. 오늘날 이올라니 궁전에 걸린 그녀의 초상화는 그저 한 왕조의 마지막 군주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자신의 민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던 한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자, 독립 국가의 꿈이 좌절된 하와이 민족의 슬픈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